“나는 증오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증오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용서할 수 있었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11.04 1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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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를 도울 때 도움 주는 당사자도 회복되는 걸 분명히 느껴
자신의 일 열심히 하고 협력관계 맺으면 자연스레 친구 생겨
정신장애인에게 일은 재활...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행위
문학회 참여하면서 정신장애인 삶이 불행할 필요 없다고 깨달아
장애인이기에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에 장애인이 돼

“다섯 살때부터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어요. 중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왕따’(집단괴롭힘)를 당했고요. 사람들이 말해요. 너는 나중에 리어커나 끌고 다닐 거야. 넌 맞아야만 말을 들어. 너 왜 사냐. 나 같으면 죽어버리겠다고.”

4일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한양대생과 정신장애인의 만남’이라는 타운홀미팅 무대. 정신장애인 당사자이자 <마인드포스트> 기자인 이관형(37) 씨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현재 그는 대구대학교 장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대학 시절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다. 상처들이 떠올라 잠 못 들던 어느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봤다. 거기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잠언이 있었다.”

그때 관형 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증오에 지쳐있었다. 아버지와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조현병이라는 붉은 낙인을 갖게 됐을 때, 어느 날 아버지가 관형 씨가 다니던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의사와 대화를 나눴고 이후 아버지는 관형 씨가 정신적 아픔을 겪는 게 부모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는 관형 씨를 때리지 않았고 마찰도 사라졌다.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형제 두 분은 20대에 다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자식에게 사랑을 제대로 표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나를 괴롭히던 그 중학교 때 친구는 초등학교 때 나처럼 집단괴롭힘을 당했는데 그 분풀이 대상을 찾다가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친구의 인생 과정을 생각하니 딱하게 여겨졌다.”

그에게서 분노와 상처가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 회복의 시간을 맞는 데 10년이 걸렸다.

질문이 들어왔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 성경이 어떤 도움을 줬는지.

관형 씨는 “아프다 보면 과거의 상처가 생각나 성경에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다”며 “그때는 오디오 성경을 들었고 그것마저도 힘들면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10년을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화에서 하나님은 내 인생의 감독이고 나는 주연”이라며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악역이 있었고 조력자도 있었고 성장 과정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되돌아보니 아름다웠다”고 전했다.

권용구(37) 씨는 현재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당사자 활동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때 웬만큼 공부를 했는데 고등학교 때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였는데 용구 씨는 여학생에 낯가림을 심하게 했다고 했다. 친구도 없었고 말도 없이 지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떨어진 건 제가 생활이 변해서 그렇게 된 걸로 생각했는데 부모님은 성적이 떨어지니 생활이 변했다고 생각해 친구도 못 만나게 했다. 그게 쌓여서 대인관계를 못했다.”

그는 탈출구로 군 입대를 생각했다. 군대에서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입대 동기들과의 마찰 등으로 입대 6개월 만에 의병제대(依病除隊)하게 된다.

“의병전역하고 나는 미친 x이 아니라고 숨기면서 살았다. 복학했는데 교수님이 ‘쟤는 취업이나 사회생활을 못할 것 같다’고 말해 낙인이 찍혔다. 친구들이 생기긴 했지만 마음이 외로웠다.”

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주치의 권유로 장애인복지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20대 때 잠시 다닌 적이 있었는데 37살 때 찾아간 복지관은 변해 있었다. 용구 씨 또래 친구들도 많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전문화돼 있었다.

그는 “회복이 덜 된 시점이라 처음에 복지사에게 혼나고 친구들도 사귀지 못했다”며 “그래서 노력을 했다. 내가 한번 노력해보자. 병 탓하면서 딴 길로 새기보다 근본적 문제를 내가 해결해보자라고 마음 먹었다”고 회상했다. 몇 년 지난 후 그는 그 복지관의 당사자 회장을 맡게 된다.

용구 씨는 “복지관에서 회복 패러다임이 있는데 당사자가 당사자를 도울 때 도움을 주는 당사자도 회복된다는 것이었다”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직접 해 보니까 그게 맞다는 걸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을 때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12년 세월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회복되면서 느낀 건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참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자신의 재능도 발견할 수 있고 할 일도 생긴다. 공부를 잘 해야지만 사회에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용구 씨는 복지관에의 참여가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냐는 질문에 대해 “친구를 사겨야 대인관계가 좋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술자리를 가져도 겉도는 식으로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며 “복지관에서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생겼다”고 전했다.

진행을 맡은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주변과 협력관계를 맺으면 친구가 생기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에서 일하면 동지가 생긴다”며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그런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정현석(43) 씨는 대학 1학년이던 20살 때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그해 여름방학 때 집으로 온 성적표는 최하위였다. 그는 현실의 도피를 위해 군대로 갈 마음을 갖는다. 그런데 군대 가는 게 두려움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당했던 왕따의 기억이 떠올랐다. 군대 간다는 것에 두려움이 들었다. 열흘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환청은 ‘넌 우리 별의 강한 전사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9개월을 갇혀 있었다.”

1997년 가을에 입원해 1998년 봄에 퇴원했지만 그는 그 후 2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현석 씨가 일을 할 수 있게 현수막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 공장을 차렸다. 처음에는 단순작업으로 30분 일하다가 1시간으로 노동 능력이 늘어났고 이후 풀 타임으로 야근까지 할 정도로 회복됐다.

현석 씨는 “정신장애인이 일을 한다는 건 큰 의미이고 재활”이라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그는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해 그곳에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그렇지만 카페는 보호시설 안에 있는 구조였고 한 달에 10만 원 정도, 밥 먹고 교통비 받는 정도의 임금으로 일을 했다. 처음에는 그는 노동법이나 최저임금법 등을 몰라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그는 “정신장애인은 근로능력에서 제외시킨다”며 “근로 능력이 없으니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된다.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주지 않다고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후 현석 씨는 보호시설 외에 외부 취업도 했다. 그렇지만 입사한 스타벅스에서는 자신과 같은 동기들에게 매니저 지위를 줬지만 자신은 복지전형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직위를 올려주지 않았다. 그곳에서 싸우고 나왔고 또 다른 커페에서 일했지만 2년 정도 일한 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당사자운동을 하는 조직을 알게 된다. 발병 후 23년 가까이 자신의 병을 숨기며 살아왔고 비당사자의 삶을 동경했는데 그 운동 조직에는 자신의 정신질환을 스스로 드러내고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일하는 모습은 그로서는 뜻밖이었다.

“23년간 정신장애를 숨기고 살았는데 활동가들을 7년 전부터 만나면서 정신장애를 드러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돈 한푼 못 받고 일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이게 나에게 지혜와 용기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석 씨는 “힘든 순간이 오면 누군가에게 비워내야 한다”며 “부모님이나 의사에게 자기 고통을 비워내고 말할 수 있었다면 고통받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많은 약물에 대해 부작용을 말해주지 않았고 이어폰도 끈으로 위해를 할까봐 못 사용하고 아침 6시에 문을 두드려 깨워서 약을 먹였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박목우(47) 씨는 지난 25년의 조현병 환자로 살았다. 그는 그 시기를 “22년은 조현병을 앓아왔고 3년 전부터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로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조현병 환자였다. 집안 경제도 어떤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목우 씨를 “아버지를 빼다 닮았다”고 자주 말했다.

“엄마가 나한테 나가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 가족 안에 있는 게 싫어서 친척집으로 친구집으로 여관으로 돌아다니며 살았다.”

23살 때 처음 입원했다. 의사는 목우 씨의 소리를 들어주기보다 의료적으로 입원만을 강요했다. 그는 억울하고 속상했다. 엄마는 그런 목우 씨를 이해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 안 한다며 화를 내고 실수에 대해 비난했는데 어렸을 때는 참고 넘어 갔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반항심이 생겨 엄마한테 대들기 시작했고 엄마도 나를 이해하기보다 똑같은 말로 맞받아치면서 관계가 악화됐다.”

목우 씨는 “사춘기 때 엄마가 심하게 말해서 저는 가슴이 아프고 힘들어서 어머니한테 화를 냈는데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맞받아쳤다”며 “저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말을 들으면 울면서 제 방으로 가서 울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30분 정도 흐르면 엄마가 들어와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정말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이었다”고 회상했다.

30살 때 마지막 입원을 했지만 퇴원 후 5년간을 그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빗소리, 물소리, 산책길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자신을 비난하는 환청으로 들렸다. 외롭고 고립된 시간이었다.

어느 날 우연처럼 지인으로부터 정신장애인들이 만든 문학회(천둥과번개)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문학회 친구들은 시인도 되고 연애도 하고 직장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삶의 의미를 갖게 됐고 정신장애인의 삶이 비참하고 불행한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들을 만난 건 내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 됐다.”

목우 씨는 “그때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의 불안과 우울들도 함께 보면서 이들의 삶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며 “친구들의 그 모습이 무기력감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느끼는 힘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느낀 정신장애인의 삶을 그렇다. 굉장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정확한 지점을 짚어낸다. 한 친구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버는 돈의 많은 부분을 쓰고 있었다. 놀라웠다. 항상 받기만 하는 친구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베푸는 걸 보면서 내가 재단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마음이 푸근했다.”

목우 씨는 “우리는 세상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이지만 세상에서 밀려나 폭력만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라며 “우리야말로 간절하게 평화와 사랑을 부른다. 우리가 그리는 인간의 얼굴이 진정한 공동체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질문이 들어왔다.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였다. 현석 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신장애에 대한 인권과 장애감수성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관형 씨는 “장애인고용공단과 복지부에서 실시하는 강사 자격증을 따라”고 조언했다.

이어 목우 씨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며 “정신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알아낸 지식과 경험을 갖고 비당사자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울림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질문. 대학 인권센터에서 일하는 분은 상담을 하러 찾아온 학생 중 어떤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정신적 장애가 분명히 있어서 피해망상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관형 씨는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목사가 된 그의 친구가 한때 자신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자기 교회에 정신장애인이 있는데 그를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도와주는 데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관형 씨는 “상담이 필요하면 상담사나 의사에게 연결해 주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라고 말해 줬다”며 “센터와 상담가, 의료가 각자의 영역에 연결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목우 씨는 “제가 힘들 때 아무도 제 말에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너는 입원을 해야 한다고만 말해 부당함을 느꼈다”며 “제 얘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한 사람만 있었으면 그렇게 강제입원 당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혼자 있다는 고립감, 배제됐다는 불안감,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게 곁에 누군가 있어주고 우리를 지지하는 체계가 있다는 걸 설명해줘야 한다”며 “지속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 교수는 “우선은 그의 아픔을 들어줘야 한다”며 “경청하면 신뢰관계가 생기고 전문가에게 상담을 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를 잘 형성한 후 조언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목우 씨가 마지막 이야기를 전했다.

“코로나19로 돌아가신 분들 10명 중 4명이 정신장애인이었다.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결과가 생겼다면 엄청난 사회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우리가 삶의 회복이라는 막연한 추상에 기댈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체적으로 권리를 획득할 지를 교육하고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번 타운홀 미팅은 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가 주관하고 한양애 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와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공동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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