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에 대한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멈춰라
조현병에 대한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멈춰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0.30 19:1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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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씨에게

여여(如如)하신지요. 마음은 소금밭인데 어디 털어놓을 곳도 없는 날들입니다.

조현병 당사자인 저로서는 최근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조현병 범죄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성을 잃은 듯한 광기어린 언론 보도들도 거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근래 일어난 조현병 당사자들이 범죄 보도들의 핵심은 이들이 조현병이라는 위험한 질병에 걸려 있다는 신화의 옹호와 전파입니다.

지난 7월, 경북 영양군에서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경찰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달에는 인천에서 50대 남성이 길 가던 60대 남성을 이유 없이 흉기로 찌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피의자는 2002년부터 2016년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역시 이달 29일에는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이웃인 6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피의자 역시 조현병 진단을 받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것뿐일까요. 이달 21일에는 자신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켰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폭행한 40대가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26일에는 50대의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발로 밟아 폭행해 의식불명 상태로 만든 20대 남성이 긴급 구속됐습니다. 그는 최근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지막에는 두려워했습니다.

조현병 당사자는 이제 범죄의 표상으로 날것으로의 세상에 서 있습니다. 범죄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이들. 그들이 조현병 당사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호소해야 하는 것일까요.

미국은 1960년대 정신병원 환자들의 탈원화를 진행합니다. 20년 후 이들을 추적 조사했을 때 이들의 삶의 질이 병원에 있을 때보다 나아졌다는 정신의학계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고 병원이라는 시설보다 자신만의 집을 제공했을 때 회복의 속도가 더 빨리 진행됐다는 보고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시점에 빠르게 탈원화가 진행되면서 일부는 노숙자나 범죄인으로 전락하기도 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정신과의사 피넬은 정신병원에 감금된 정신질환자들의 발에 묶인 족쇄를 풀어주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들을 묶어두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편견에 따라 감금하고 묶었지만 막상 족쇄가 풀린 이들은 오히려 더 얌전했다고 합니다.

20세기 이탈리아 정신과의사 바살리아는 ‘자유가 치료’라는 대의를 내세워 정신병원을 모두 폐쇄시키게 합니다. 1980년 이탈리아에서는 더 이상 정신병원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일본의 경우 정신병원 병상은 33만여 개입니다. 우리보다 세 배 정도 많은 베드를 갖고 있습니다. 50년 이상 정신병원에 머물러 있는 이들도 1천700여 명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현재 빠르게 병상수를 줄여나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반면 우리는 정신병원 병상수가 기형적으로 증가해 왔습니다. 왜냐면 정신질환자 한 명을 입원시키면 국가가 치료 명목으로 병원에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환자 한 명 한 명은 자본의 표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 가운데 치료가 개입할 수 있을까요. 의료급여 환자의 경우 정액수가제에 묶여 질 낮은 약을 복용해야 하고 형편없는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인권은, 그리고 환자로서의 권리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무엇이 조현병 당사자들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늘 범죄의 표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걸까요.

 

J씨.

니체가 신의 사망 선고를 내렸을 때 그의 선고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면적 사망 선언이었다는 누군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니체는 그 신을 죽인 장본인으로 나와 너가 아닌 우리 모두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죽였고 네가 죽였고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지요. 한 광인(狂人)이 낮에 횃불을 들고 ‘나는 신을 찾노라, 신이 어디로 갔는가’라고 중얼거리자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광인을 놀립니다. ‘글쎄, 신이 어디로 갔을까, 시장으로 갔을까’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광인은 이윽고 노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저 교회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신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장송곡이 아닌가. 저 교회야말로 신의 무덤터가 아닌가. 신이 죽어 내는 송장 냄새가 나지 않는가.”

니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공범자입니다. 누구도 신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광인을 주목합니다. 그는 비정신장애인이 아니라 정신장애인입니다. 어쩌면 조현병 환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으로 강제입원당하지 않고 세상에서 자신만의 논리로 신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광인은 외로웠을까요. 그는 신을 죽인 게 우리 모두라는 점에서 가장 앞장서 신에게 속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신을 죽였지만 신은 여전히 불멸의 표상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신을 숭배하는 모든 행위들이 사실은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 죄의식에 대한 방어기제로서의 의식들은 아니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J씨

신의 사망을 선고했고 그 사망의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돌렸던 저 광인은 어쩌면 ‘자유인’이었을 겁니다. 마치 석청을 잡아먹으며 신의 세계를 알리고 속죄를 주장했던 사도 요한처럼 그도 진리를 전하는 자유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광기는 그렇게 자유에 포섭됩니다. 근대세계가 광인을 수용소와 정신병원으로 집단 수용시키지 않았다면 광기는 여전히 자유의 표상으로 세계를 이야기하는 한 부분으로 작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는 이들을 위험성으로 포섭했고 질병이라는 낙인을 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성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수용시설에 들어가게 만들고 맙니다. 즉, 병원이 있지 않았다면 정신질환도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광기는 자유를 잃었고 날것으로의 삶의 사유를 잃었습니다.

이후 광기가 얻은 낙인은 잠재적 범죄자이며 예견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자로 명명됩니다.

만약 니체의 광인이 정신적 질병에 포섭돼 정신병원으로 갔다면 우리는 그를 통한 더 많은 사유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 광인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의 정신적 슬픔과 광기를 품고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광인의 신을 찾는 슬픔을 알아주지 않고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면 신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듯이 그의 감금에도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광기를 수용소에 집어넣은 공범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J씨.

어떤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해 집단으로 호명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덮여 버립니다. 젠더적 구성, 민족, 인종 등이 교차하게 되면 그 차별성은 더 강화되지만 집단적 호명은 이 차별성을 지우게 합니다.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이 구성될 때 사람 개개인이 가지는 고통과 차이, 개별적 특이성은 모두 가려지고 민족이라는 담론만이 힘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는 개별적 인간의 조건이 모두 탈화되고 민족 안에 포섭돼 차이를 사유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질환도 그렇습니다. 이 특정 질병코드가 위험성으로 분류될 때 정신질환이 가지는 특이성과 차별성은 가려져버립니다. 다만 두려움으로 세계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조현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특이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한 조현병 당사자는 사회에 고스란히 잠재적 범죄자이자 두려움의 대상으로 왜곡돼 버립니다.

이 두려움을 제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정신질환자를, 조현병 환자를 격리하고 영구 배제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위험은 시민인 곧 나의 위험성이며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범죄를 저지를 이성을 잃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격리는 기꺼이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정신요양시설과 정신병원으로 몰아넣은 사회는 그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구성원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일까요.

니체의 광인처럼 정신장애인을 무덤과 같은 병원과 요양소로 보낸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은 아닐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것처럼 우리 모두가 정신장애인을 죽여버린 공범인 것입니다.

J씨.

정신장애인은 살고 싶어하는 존재자들입니다. 이들도 윤리적 사유를 할 수 있고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고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시민적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정신병원에서부터 거세돼 버립니다. 정신장애인의 바람은 정신과전문의와 병원의 시스템에서 걸러져 사회로 나오지 못합니다. 1996년 정신보건법이 시행되기도 전인 그 오랜 기간 근대의 병원과 시설에 있던 이들의 목소리는 사회로 나오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갖고 살아가고 싶다는 절규였습니다. 다만 사회는 이를 외면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빼앗긴 자유와 감금에 책임은 없을까요. 우리 사회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포용해줬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조현병(정신질환)에 의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자 일부 언론에서는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입원을 까다롭게 해서 정작 제때 치료받아야 할 이들이 지역사회에 방치돼 사고를 일으킨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이들은 적절한 시기의 치료를 강조하지만 치료 시스템이 작동하는 병원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왜 그 오랜 시간 침묵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호자 한 명의 동의만 있으면 밧줄에 묶여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야 했던 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절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지도 말입니다.

J씨.

조현병 당사자들은 살고 싶어 하는 존재자들입니다. 왜 우리를 구속하려고만 하는 걸까요. 사회는 왜 우리를 침묵의 범죄자로 규정하고 있는 걸까요.

인구 1만 명 당 한 명이 저지르는 범죄를 갖고 일반화시키는 언론 보도는 이제 자제되어야 합니다. 조현병 당사자들이 어떤 사회적 환경에 처해 있으며 어떤 유무형적 제도적 탄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언론은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우리를 저 죽음 같은 정신병원과 요양시설로 말없이 끌려들어가게 한 책임도 언론에게 일부 있습니다. 언론이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개인이 가지는 존재론적 두려움과 사회적 왜곡된 분노를 표상화시켜 ‘마녀사냥’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악순환은 근대의 모퉁이에서 시작돼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J씨.

저는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세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우리가 다만 정신적 질환으로 아파하는 존재들이지 이성이 거세된 폭력적 범죄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욕구를 들어주세요. 우리가 공동체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우리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존엄을 훼손당한 채 죽어가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가 정신병원과 요양시설로 밧줄에 묶여 들어가는 한 언론과 사회도 공범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였듯이 우리 모두가 정신질환자를 범죄자로 생산하고 죽인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하나의 범죄로 정신장애인 전체를 범죄자로 보는 프레임을 이제는 멈춰 주십시오. 무엇보다 그것을 언론에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여여(如如)한 날들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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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 2018-10-31 22:40:56
시의적절한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편집국장님의 기사들 늘 시간 나는 대로 찾아보고 있습니다. 당사자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계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이 광풍이 미신적 사고, 공포에 기인한 광품이 이성의 힘으로 이해되고 잠재워지며 조현병 나아가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정신질환은 남의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가 될 수 있고 내 가족의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은 경험해보는 정신질환을 사회경제적 구조의 모순과 부당성에 대한 분노를 덮는 의도로 이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김어준 씨가 혹 이것에 대해서는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는지 궁금하군요. 분명히 여론을 움직이는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말이죠

전민 2018-10-31 22:36:28
존재로 진화해 나간다는 믿음은 우리와 다음세대, 나아가 지구 전체를 위해서 반드시 우리가 인식해야 할 사안입니다. 그러나 미신적이고 비과학적, 비이성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우리 인류를 위협하고 있고 지금의 조현병광풍이 부는 것 역시 그런 인류의 오래된 본능적 방어기제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근거, 팩트에 기반한 이성주의, 과학주의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불신임을 받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빡빡하다, 피곤하다, 등등 이유를 들어 이성을 가진 인류가 이성을 불신하는 경험을 종종 관찰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자신을 탐구하지 않는 인류는 결국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이성적 사고방식을 신뢰해야 합니다.

전민 2018-10-31 22:32:43
천재와 광인의 차이는 종이한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어쩌면 또 다시 희생양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거 중세시대의 체제유지와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서 마녀사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정신질환자와 정상인은 단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며, 어떤 인간도 이상적인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공동체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찾는 건강한 방법보다 손쉬운 해결책이자 가장 초보적이고 미신적인 방식인 '희생양 찾기'가 보통사람들에게 더 어필하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촛불혁명을 겪은 세대로서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믿고 있습니다.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되며 인류는 더더욱 이성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