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다…KBS ‘F20’ 방영 보류 기자회견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다…KBS ‘F20’ 방영 보류 기자회견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10.27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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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통해 방영 예정이던 ‘F20’ 전면 보류…“재방영할 경우 저항할 것”
정신장애 단체 “방영 보류가 아니라 중단·취소하고 직접 사과해야”
KBS2 방영 예정이던 'F20'의 보류에 대한 기자회견이 27일 영등포구 KBS 신관 정문에서 진행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KBS2 방영 예정이던 'F20'의 보류에 대한 기자회견이 27일 영등포구 KBS 신관 정문에서 진행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결국 KBS가 영화 ‘F20’의 지상파 방영을 보류했다. 2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 정문에 모인 정신장애 관련 단체들은 방영 보류를 축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저항해 이룬 성과에 대한 기념이었다.

영화 ‘F20’은 조현병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극중 인물들이 조현병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질병이며 이를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까지 내보냈다.

영화가 개봉된 이달 6일 이전에도 ‘F20’에 대한 우려는 정신장애계 내에서 심각하게 논의됐다. 9월 16일에는 청와대국민청원게시판에도 이 영화의 상영을 반대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 조현병을 상업적 목적에 이용했다며 이는 정신장애인과 가족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인드포스트> 역시 수 차례에 걸쳐 영화 상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지금까지 영화 ‘F20’을 관람한 관객 수는 2만3000여 명이다.

문제는 KBS가 직접 제작하고 투자하고 제작한 이 영화가 29일 KBS2를 통해 안방에 방영된다는 점이었다. 정신장애계는 집단 반발했다.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정신장애 시민·인권단체들은 지난 20일과 25일에 각각 KBS 신관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KBS 측은 25일 기자회견이 진행되자 정신장애인 단체와의 면담에 나섰다. 단체들은 방영 취소와 제작 책임자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KBS 측은 “방영 중단 여부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진행되니 양해해 달라”고 답했다.

단체들은 “오는 27일 오전까지 확답이 없을 경우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F20’의 방영을 막겠다”고 최후통첩했다.

이후 단체들은 향후 투쟁 계획 등을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논의했다.

권용구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권용구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그리고 26일, KBS는 정신장애 단체들에 영화의 방영을 ‘보류’한다고 알렸다. 27일 예정된 기자회견은 투쟁이 아닌 ‘축하’의 성격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 정신장애인은 권력이 만들어내는 모든 의제에서 배제당해 왔다. 또 미디어가 정신장애를 차별하는 방송을 내보내도 항의할 수 있는 통로가 없는 목소리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KBS 측과의 집단적 싸움에서 유효한 성과를 내면서 정치적 대표성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력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순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기자회견에는 단체와 개인 등 50여 명이 참여했다.

권용구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KBS의 방영 보류 결정은 기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언론 매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김재완 동대문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정신장애인을 인격 파탄으로 만든 ‘F20’ 같은 영화들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이 편견이 정신장애인의 사회 복귀를 막고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 정신장애인사회통합연구센터의 김강원 부센터장은 “KBS가 공영방송으로의 책임성을 가진다면 상영 보류가 아니라 중단·취소가 돼야 한다”며 “잘못된 보도와 왜곡으로 정신장애인을 격리·배제되도록 KBS가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소연 마포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KBS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시청률을 우선시하느라 정신장애인의 삶을 배제했다”며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신석철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준비위원장(오른쪽)이 KBS 관계자로부터 입장문을 전달받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신석철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준비위원장(오른쪽)이 KBS 관계자로부터 입장문을 전달받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임광순 활동가 역시 “정신장애인은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들인데 KBS가 위로 대신 편견을 더 심화시켰다”고 전했다.

이어 변윤 활동가는 “KBS 방영이 보류된 것이지 영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방영 보류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사과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이 진행된 지 40여 분 후, KBS 측에서 관계자가 나와 방영 중단 사과 대신 제작진 명의로 된 입장문을 전달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KBS 제작 관계자는 KBS 신관 정문에서 신석철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준비위원장에게 입장문을 전달했다. A4 용지에는 “(KBS는) 해당 드라마 방영을 보류한다. 추후 방영 일시는 정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공영방송 KBS는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는 의견 또한 담겨 있었다.

KBS 측이 정신장애 단체들에 전달한 입장문 전문. (c)마인드포스트.
KBS 측이 정신장애 단체들에 전달한 입장문 전문. (c)마인드포스트.

오전 11시 45분쯤 기자회견은 끝났다.

이번 투쟁의 성과에 대해 한 정신장애 활동가는 “우리가 내는 목소리를 권력이 인지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정신장애 운동의 정치적 힘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라며 “‘F20’ 투쟁을 통해 정신장애인 인권의 정치적 담론화가 폭넓어지고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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