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언론의 ‘프로아나’ 보도는 ‘프로아나’를 홍보하는가?
[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언론의 ‘프로아나’ 보도는 ‘프로아나’를 홍보하는가?
  • 박지니(책 ‘삼키기 연습’ 저자)
  • 승인 2023.02.1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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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아나’는 십대 소녀들의 비난 받을 다이어트 유행에 불과한가?

몇 년 전 모 일간지의 수습기자가 SNS를 통해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섭식장애와 ‘프로아나(pro-ana)’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어떤 기회가 됐든 그에 관해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나는 그의 제안에 반갑게 응했다. 짧게 전화 인터뷰를 하고, 회사 업무 시간에 자료를 모아 메일로 발송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일간지 웹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는 포르노였다. 그러니까 요즘 언론에서 좋아하는, 혹은 쉽게 쓰고 달성감을 느낄 수 있을 ‘프로아나 포르노’. 십여 년 전 사망한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의 옥외광고 사진이 클리셰처럼 같이 실린 건 물론이다. 내가 전한 자료들은 열어 보지도 않았을 테고, SNS에서 찾은 기아의 이미지와 글귀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들만 뽑아 열거했을 것이 뻔했다. 강력하고 매혹적인, 뭔가 공식적인 읽을 거리를 출고했다고 짐짓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까닭은 몰라도, 그 기사는 다행히 얼마 안 가 삭제됐다. 데스크의 결재 없이 출고됐던 걸까 싶을 정도로 어이 없는 조치였다. 하지만 그 판박이 수준의 ‘프로아나 포르노’는 틈만 나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황색언론 특유의 마케팅 기법으로서 말이다.

(c)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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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아나 커뮤니티와 그에 대한 사회 담론을 본격 연구한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 데이비드 가일스(David Giles)는 한 논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남성으로, 20년 전 초창기 프로아나 커뮤니티부터 그 이후의 흐름을 자신이 직접 해당 커뮤니티들의 회원으로 가입해 면밀히 지켜봐 온 사람이다.)

2001년 고급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코스모폴리탄>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밀 집단’의 정체를 밝혔다. 그것은 테러리스트 조직의 불법 무장단체도, 나치즘에 현혹된 소아성애자들의 비밀 네트워크도 아닌, 오직 헌신적 단식가의 금욕 수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순수의 상태로서의 거식증을 찬미하는, 섭식장애에 대한 낭만적 페티시즘 – 소위 ‘프로아나’를 독려하는 웹사이트들이었다… (중략) ...곧이어 언론의 위협적 보도가 시작됐다. 그들은 당신의 딸일 수 있다. 불안하고 우울한 당신의 십대 딸이 무심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소위 ‘자극짤(thinspiration)’이라 불리는 뼈와 가죽만 남은 여성들의 사진으로 가득한 웹사이트를 만나고, 거기서 요령을 배워 섭식장애 증상을 가족에게 숨기는 법을 터득하고, 부모로서 당신이 딸의 컴퓨터 사용을 제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는 이미 딸은 그 악의 무리에 세뇌당해 있을 것이다...[1]

내 책 <삼키기 연습>에도 기술했지만, 20여 년 전 내가 외국 프로아나 커뮤니티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이었다. 체중을 줄이고 싶어한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그 정도와 강도, 자신의 몸과 현재 자신의 삶,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정도에도 서로 큰 차이가 있었고, 언뜻 보기에도 섭식장애 환자로 보이는 십대 모델 지망생이 있는 반면 그저 체중을 조금 줄였으면 하는, 온화하고 느긋한 중년 여성도 거기 있었다.

커뮤니티의 전반적 분위기도 일반 온라인 커뮤니티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소셜미디어와 해시태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재의 프로아나 트렌드는 그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은, 소셜미디어 상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정말 실존하는 심각한 10~20대 거식증 환자를 증명하는가, 소셜미디어의 프로아나 메시지가 실존하는 한 사람의 정신병리적 멘털리티와 일대일로 대응하는가다.

섭식과 체중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수많은 여성들에게 편치 않은 이슈다. 심지어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교대 근무 간호사들 사이에서 ‘다이어트’에 대한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것을 본 적 있었다. 막내 간호사가 자신은 다이어트할 권리를 이러쿵저러쿵 따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이어트가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라는 욕망에 대해선 무조건 미심쩍은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암묵적 규범이었던, 다이어트 얘기가 거의 금기시 됐던 그곳에서 말이다.

*

역시 영국의 섭식장애 연구자이면서 매체인류학자이기도 한 애나 래비스(Anna Lavis)는, 프로아나 커뮤니티를 섭식장애의 ‘원인’으로 단순히 상정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프로아나 소셜미디어에 빠지는 현상을 면밀히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피상적인 선악구도만 양산할 뿐 아니라 거식증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 방해한다고 분석했다[2].

(유명한 미국의 정신과의사 스티븐 레벤크론이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표현으로) 프로아나 사이트들을 “여자아이들을 거식증으로 꾀어내는” 섭식장애 유발자로 보는 방식은 거식증을 온라인상의 이미지만 보고도 “옮을” 수 있는, 체중 감량의 욕망 그 이상은 아닌 것으로 곡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정신질환 중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질환 중 하나'인 거식증과 고투하는 청소년들의 경험을 하찮은 것으로 격하시킨다.

(c)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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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아나’라는 것이 온라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이었다. ‘Empressanorexia_nyc’이라는 닉네임의 누군가가 야후(Yahoo)에 ‘Anorexia with Pride (AWP)’라는 그룹을 개설했다. 그 그룹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는지는 몰라도, 거기서부터 힌트를 얻은 이들이 자기 나름의 프로아나 사이트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섭식장애 회복 정보 사이트들이 이 유행을 알게 되고 언론의 포화가 개시된 2001년 무렵, 웹호스트들은 프로아나 사이트 개설을 금지시키고 기존 커뮤니티들을 삭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2012년에는 텀블러(Tumblr), 인스타그램(Instagram), 핀터레스트(Pinterest) 같은 이미지 중심 소셜미디어가 비판의 타깃이 됐고, 이들은 ‘프로아나' 게시물들을 삭제했다. 이후로도 프로아나 콘텐츠를 고사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시도됐다.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thinspiration’ 같은 검색어가 금지됐고 - 그러나 특수문자 사용 등 기발한 방식으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소통을 이어갔고 - 지금도 섭식장애 유관 검색어들은 경고성 메시지를 동반하기도 한다.

얼마 전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인공지능 달리(DALL·E)가 갓 등장해 유행했을 때, 나는 내 책의 표지를 달리는 어떻게 만들까 궁금해 책을 설명하는 문구를 입력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eating disorders’라는 단어가 포함된 텍스트는 결과치를 내놓지 못했다. ‘섭식장애’와 함께 달리에서 금기어였던 것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었다.

래비스는 프로아나 사이트들이 제각기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지만, 언론이 관심 갖는 영역은 특히 두 가지, “프아팁(tips and tricks)”과 “프아 자극짤(thinspiration)”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특히 이런 콘텐츠들이 소셜미디어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팽배하고 있는데, 언론은 이를 두고 프로아나들이 “괴기스럽고” “역겨운” 콘텐츠로 “극단적인 체중 감량을 위한 지식, 태도, 행동을 권하고 조장한다”고 보도한다.

문제는, 이 같은 언론의 선정적 보도가 과연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느냐다. 거식증이 하나의 복잡한 정신병리라고 보는 대신 이런 식으로 ‘정상적 다이어트에서 출발하는 연장선상의 다른쪽 극단’으로만 치부될 경우, ‘자극짤’이나 ‘프아팁’은 극단적인 ‘체중 감량의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프로아나는 ‘체중 감량을 위해 비윤리적인 인터넷 정보에 의존하는’ 이들에 지나지 않게 되고, 포르노 식으로 보도되는 프로아나 정보들은 ‘불법 체중 감량 수단’을 암묵적으로 홍보해 주는 것으로 끝난다. 래비스의 논문에서처럼 “프로아나 사이트를 알게 된 건 기사에서 봤기 때문”이라고 보고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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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비스는 프로아나 커뮤니티가 초창기부터 참가자들에 ‘지지적인’ 기능을 해 왔다고 지적한다. ‘지지(support)’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텐데, 이들이 서로 공유했던 지지는 회복을 위한 치료적 지지가 아니라 “섭식장애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안식처, 회복을 강요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압박에서 피해 거식증에 대한 생각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지지라는 것은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또 한편, 프로아나가 대중적 이미지에서처럼 “그악한 사이비 종교 추종자들이 순진한 아이들을 세뇌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고통 속의 아이들이 서로를 돕는 공간”이었다는 것 역시 지적할 점이다.

프로아나들은 거식증에서의 회복에 저항한다. 그것은 흔히 이야기되듯 “섭식장애를 찬양”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다른 까닭으로 힘겹고 위태로웠던 삶의 조건에서 그들에게 마법적 적응기제(coping mechanism)가 되어 주었던 거식증을 계속 고수하고 싶기 때문, 자칫 긴장을 놓는 실수로 거식증이라는 방패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래비스는 프로아나에 동조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병과 섭식장애로 인한 폐해를 절대 부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도 지적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건강치 못하고 병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대안이 없을 뿐이다. 대안이 없다고 느껴질 뿐이다. 단순히 다이어트, 사회의 미적 기준에 대한 강박적 순응이 아닌, 다른 더 깊은 문제가 그들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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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키기 연습>에 이렇게 썼다.

"현재, 특히 국내에서 ‘프로아나’ 이슈는 웹사이트보다는 주로 소셜미디어상의 문제로 논의된다. ‘프로아나’로 정체화한 SNS 사용자들이 신체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공유하고 극단적인 다이어트 방식을 독려해 서로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된다.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은 수년 전부터 이미 특정 검색 키워드나 해시태그를 제한하는 식으로 조치를 취해왔지만, 그 같은 손쉬운 조치는 거의 소용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thinspiration’을 차단해도 프로아나 군단은 대신 ‘#thynspiration’ ‘#thinspire’ 등 변형된 해시태그를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특정 주제의 콘텐츠를 제한하는 식의 뭉툭한 규제는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을 사귀고, 같은 경험을 한 동료를 만나고, 마침내는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을 제한해버릴 위험도 있다.

2019년 4월 영국 정부가 <온라인 유해 콘텐츠 백서(Online Harms White Paper)>를 발표한 뒤, 심리적 어려움을 겪은 이들이 발간하는 영국의 정신건강 매거진 <원 인 포(One in Four)>의 편집장이었으며 현재는 영국 정신건강센터 입주 작가로 있는 마크 브라운(Mark Brown)은 이에 대한 생각을 기고했다[1]. 정확히 말해 그가 다룬 주제는 프로아나가 아닌 자해였지만, 그가 짚는 부분은 프로아나 SNS 계정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백서의 제안이 자해와 자살 조장 콘텐츠의 확산을 제한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그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선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소셜미디어는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해본 타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공간이 되어왔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콘텐츠는 공공에 공유되어야 한다. 심리적 어려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고 유용한 소셜미디어 콘텐츠가 그 같은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충격적일 수 있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서 무엇을 어떻게 논의하는지는 그 의미의 맥락에 크게 의존한다. 지지받고 싶은, 혹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한 사람의 호소가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치 못한 생각의 조장 또는 심지어 그것을 모방하게끔 하는 독려가 되기도 한다.'"

*

언론이 소셜미디어의 프로아나 콘텐츠를 복제하고 증폭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아나의 '자극짤'을 큐레이팅해 보여주며 '젊은 층 섭식장애 환자 급증'을 알리는 것의 효과는 무엇일까? 그런 기사와 보도는 현실에서 무엇을 수행할까?

<혐오와 수치심>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소수자들 - 그리고 당연히 여성도 그 중에 포함되는데 - 에게 우리가 갖고 있으나 부인하고 싶은 측면을 투사하며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정동적 역동에 대해 고찰한다. 이들 소수자의 “가시적 손상”에 우리가 부인하고픈 인간성의 모든 측면에 투사돼, 그들에 대한 혐오감의 원천이 되고 그들에게 수치심의 형벌을 내릴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프로아나라는 젠더화된 가상의 집단에, 언론과 사회는 스스로의 어떤 불안을, 어떤 욕망과 죄의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1] “We can find ‘our people’ on social media - but not if mental health content is over-regulated”, Mental Health Today, 2019. 6. 10. https://www.mentalhealthtoday.co.uk/blog/technology/you-can-find-yourpeople-on-social-media-but-only-if-politicians-avoid-knee-jerkregulation

[1] Giles, D.C. (2016). Does ana = anorexia? Online interaction and the construction of new discursive objects. In M. O’Reilly & J. Lester (Eds). The Palgrave Handbook of Adult Mental Health: Discourse and Conversation Studies (pp. 308-328) Basingstoke: Palgrave.

[2] Lavis, A. (2016). Social Media and Anorexia: A Qualitative Analysis of #ProAna. Education and Health, 34(2), 57-62. http://sheu.org.uk/x/eh342al.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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